정치 대표성을 부정한 순간, 투표는 사라지고 방아쇠가 ‘정의’로 위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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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의자는 트럼프를 정치 대표자가 아닌 처단 대상으로 본 것으로 알려졌지만,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사적 응징은 정의가 아니라 폭력이다./bbc |
정치폭력은 대개 “나는 폭력을 원했다”는 말로 시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정의를 원했다”, “나는 악을 막으려 했다”, “나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는 말로 시작한다. 백악관 출입기자단 만찬장에서 벌어진 트럼프 암살 미수 사건이 섬뜩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용의자는 단순히 트럼프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트럼프를 더 이상 정상적인 정치 대표자로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트럼프를 선거로 심판할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이 직접 처벌해야 할 범죄자로 상상했다.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는 토론장이 아니라 사냥터로 변한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용의자 콜 토마스 앨런은 워싱턴 힐튼 호텔에서 열린 백악관 출입기자단 만찬장 인근에서 무장을 한 채 접근했고, 비밀경호국 요원이 부상을 입었다. AP와 CBS는 그가 총기와 흉기를 소지했으며, 범행 전 가족에게 정치적·종교적·철학적 불만이 담긴 글을 보냈고, 가족 중 한 명이 이를 당국에 알렸다고 보도했다. 로이터는 당국이 아직 동기를 최종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트럼프와 행정부 관계자들이 표적이었을 가능성을 수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가 아니라 분류다. 보도에 따르면 용의자의 글에는 트럼프 또는 그 주변 권력을 향해 “소아성애자, 강간범, 반역자”라는 식의 극단적 범죄 낙인이 등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는 CBS 인터뷰에서 관련 주장에 대해 강하게 부인했고, 수사당국은 해당 글과 범행 동기를 조사 중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사실로 확인된 혐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용의자의 주장 또는 인식으로 다뤄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더 중요하다. 사실 여부가 아니라, 범인이 어떤 방식으로 정치인을 ‘처벌 가능한 대상’으로 재분류했는지가 이 사건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은 선거로 심판받는다. 범죄 혐의가 있다면 수사와 재판으로 다툰다. 법원이 판단하고, 시민은 절차를 감시한다. 그런데 극단주의자는 이 순서를 견디지 못한다. 그는 먼저 낙인을 찍고, 먼저 판결을 내리고, 먼저 집행자가 되려 한다. “저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라 범죄자다.” “그를 지지하거나 그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도 공범이다.” 이 논리가 완성되는 순간, 투표용지는 무력해지고 총구가 등장한다. 민주주의의 시민은 유권자였는데, 어느새 자칭 집행자가 된다.
이것은 독재국가의 논리와 묘하게 닮아 있다. 독재는 반대자를 정치적 경쟁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반대자는 늘 반역자이고, 간첩이고, 국가의 적이며, 인민의 배신자다. 독재 체제에서 숙청은 폭력이 아니라 “정화”로 불리고, 처벌은 보복이 아니라 “인민의 심판”으로 포장된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보이는 위험한 상상력도 그와 닮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국가권력이 아니라 한 개인이 그 역할을 자처했다는 점이다. 독재국가가 국가 이름으로 하는 일을, 극단화된 시민이 자기 양심의 이름으로 하려 든 것이다.
풍자적으로 말하면, 그는 선거관리위원회도, 검찰도, 법원도, 배심원도 필요 없는 1인 공화국을 세운 셈이다. 자기 머릿속에서 기소하고, 자기 분노로 재판하고, 자기 손으로 형을 집행하려 했다. 이 얼마나 간편한 정의인가. 증거는 확신으로 대체되고, 절차는 분노로 생략되며, 법치는 방아쇠 앞에서 밀려난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시민의 얼굴을 한 사적 처벌이고, 양심의 이름을 도용한 정치 테러다.
특히 만찬 참석자들까지 공범의 원 안에 넣었다는 식의 보도 내용은 더 위험하다. 정치 대표성을 부정하는 순간, 표적은 한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그 사람을 지지한 유권자, 그와 함께 일한 참모, 같은 공간에 앉은 참석자, 심지어 침묵한 시민까지 모두 ‘공범’으로 확장될 수 있다. 이것이 결사단식 정치폭력의 특징이다. 그들은 한 명의 악당을 상상하지만, 곧 그 악당 주변에 거대한 공범 명단을 만든다. 그리고 그 명단은 언제나 늘어난다.
이런 사고방식은 역사적으로 매우 위험했다. 정치적 암살단과 비밀결사, 혁명적 처단 조직, 이념 자경단은 언제나 “우리는 범죄자가 아니라 정의의 대리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것은 자유가 아니라 공포였다. 정치 대표를 인정하지 않는 순간, 사회는 서로의 대표를 제거하려는 집단들의 전쟁터가 된다. 오늘은 트럼프가 표적이지만, 내일은 반대 진영 지도자도 같은 논리의 표적이 된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지도자는 대표가 아니라 범죄자다”라는 문장이 허용되면, 모든 선거 결과는 잠재적 처단 명령서가 된다.
물론 정치인은 비판받아야 한다. 트럼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권력자는 더 거칠게 검증받아야 하고, 혐의와 논란은 언론과 법정과 의회를 통해 따져야 한다. 하지만 정치적 대표성을 부정하는 것과 비판하는 것은 다르다. 비판은 민주주의의 언어지만, 대표성 박탈은 폭력의 문턱이다. “나는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은 시민의 권리다. 그러나 “그는 대표가 아니므로 시민이 처벌해도 된다”는 말은 민주주의 파괴의 선언이다.
이 사건이 한국 정치에도 던지는 경고는 분명하다. 우리도 상대 정치인을 자주 괴물로 만든다. 범죄자, 반역자, 매국노, 파시스트, 내란 세력, 종북 세력이라는 말들이 너무 쉽게 오간다. 어느 순간부터 상대는 설득할 시민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오염원이 된다. 지지자는 공범이 되고, 침묵자는 방조자가 되며, 중립은 배신이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누군가는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정치권이 던진 은유가 거리의 누군가에게 명령문으로 읽히는 순간, 말은 총보다 먼저 사람을 겨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의 핵심 문장은 이것이다. 그는 트럼프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트럼프가 대표할 권리를 부정했다. 그리고 그 부정의 끝에서 시민 처벌의 망상이 등장했다. 이것은 반독재가 아니라 작은 독재다. 국가 독재가 위에서 내려오는 폭력이라면, 이런 자경단식 응징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폭력이다. 둘은 서로 적처럼 보이지만, 구조는 닮았다. 둘 다 법을 기다리지 않고, 절차를 우습게 여기며, 자신이 정한 악을 제거하려 한다.
민주주의는 마음에 드는 지도자만 인정하는 제도가 아니다. 싫어하는 지도자도 절차 안에서 다투는 제도다. 그 지도자가 범죄 혐의를 받는다면 법정으로 가야 하고, 정책이 틀렸다면 선거로 밀어내야 하며, 권력이 위험하다면 언론과 의회와 시민사회가 감시해야 한다. 그러나 총을 든 시민은 감시자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 국가가 되려는 사람이다. 바로 그 순간 시민은 민주주의의 주인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파괴자가 된다.
결국 백악관 만찬장 총격 미수는 미국 정치폭력의 또 다른 사건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이것은 현대 민주주의가 맞닥뜨린 가장 위험한 유혹을 보여준다. “내가 원치 않는 지도자는 대표가 아니다. 그는 범죄자다. 그러므로 내가 직접 처벌하겠다.” 이 문장이 어느 진영에서 나오든, 그 끝은 자유가 아니라 피다. 정치가 아무리 더러워도, 시민이 사적 처벌단이 되는 순간 사회는 더 더러워진다. 민주주의의 마지막 방어선은 완벽한 지도자가 아니라, 싫어하는 지도자조차 법과 절차로 다루겠다는 시민의 인내다.
참고문헌
- Reuters, Who is Cole Allen, the suspect in the White House Correspondents’ Dinner shooting?
- Associated Press, Accused attacker at Washington media dinner is a tutor and computer engineer from California
- CBS News, What we know about the suspect in shooting at White House Correspondents’ Dinner
Socko/Gho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