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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4일 월요일

[팔레스타인 언론자유] 세계 언론자유의 날과 노동절이 만난 가자… 자유도 노동도 폐허 위에 섰다

 

가자지구의 언론자유의 날과 노동절을 배경으로 전쟁 속 기자와 노동자의 생존 현실을 다룬 시사 이미지
세계 언론자유의 날 가자의 기자들은 숨진 동료들을
 추모했고,  노동절의 가자 노동자들은 폐허 속에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aljazeera

세계는 달력 위에서 기념일을 만든다. 언론의 자유를 기리는 날이 있고, 노동의 존엄을 말하는 날이 있다. 그러나 가자에서는 그 두 기념일이 축하가 아니라 생존 보고서가 된다. 세계 언론자유의 날을 맞은 팔레스타인 기자들은 자유로운 취재 환경을 말하기보다 숨진 동료들의 이름을 먼저 불러야 했다. 노동절을 맞은 가자의 노동자들은 노동권과 임금 협상을 말하기보다 하루 벌이를 위해 무너진 건물 잔해 위로 올라가야 했다. 기념일은 거창한 구호를 달고 오지만, 가자의 현실은 그 구호를 폐허 앞에 세워놓고 묻는다. 자유는 어디에 있고, 노동은 무엇으로 남았는가.

5월 3일 세계 언론자유의 날, 가자의 팔레스타인 기자들은 전쟁 중 희생된 동료들을 기리며 언론인 보호를 요구했다. 알자지라는 가자에서 팔레스타인 기자들이 세계 언론자유의 날을 맞아 이스라엘에 의해 숨지거나 표적이 됐다고 보는 동료들을 추모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교황 레오도 전쟁 지역에서 진실을 좇는 기자들의 보호를 촉구했다. 전쟁에서 기자는 관찰자처럼 보이지만, 가자에서는 관찰자의 자리조차 안전하지 않다. 카메라는 방패가 되지 못하고, 취재증은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 보도 현장은 곧 표적이 되고, 기자의 집과 사무실과 차량도 전쟁의 바깥에 남지 못한다.

팔레스타인 측 기관들은 가자에서 숨진 언론인 수가 260명을 넘었다고 주장한다. 이 수치는 이스라엘 측이나 국제 감시단체의 집계 방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그대로 확정된 국제 통계처럼 쓰기는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숫자의 논쟁을 떠나 분명한 것은 가자가 현대 전쟁에서 기자에게 가장 위험한 공간 중 하나가 됐다는 사실이다. 언론의 자유는 법 조항이나 국제 선언에서만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기자가 현장에 갈 수 있어야 하고, 기록할 수 있어야 하며, 기록했다는 이유로 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아야 한다. 가자에서 그 기본 조건은 이미 깊이 훼손됐다.

노동절의 가자도 다르지 않았다. 알자지라는 5월 1일 노동절에 가자 노동자들이 붕괴된 경제 속에서 가능한 생계 수단을 찾아 위험한 일터로 내몰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24세 노동자 이브라힘 아부 알에이시는 파괴된 건물 잔해를 치우는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가 서 있는 곳은 공장이 아니라 폐허이고, 그가 상대하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무너진 콘크리트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잔존 위험이다. 노동절이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는 날이라면, 가자의 노동절은 권리 이전에 생존을 말한다. 일할 권리보다 먼저 살아남을 권리가 무너진 곳에서, 노동은 존엄의 이름보다 절박한 생계의 이름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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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모니터도 노동절을 맞은 가자 노동자들이 전쟁으로 안전과 안정, 존엄을 잃은 채 극도로 어려운 생활과 노동 조건을 견디고 있다고 전했다. 전쟁은 노동시장을 파괴한다. 공장은 멈추고, 상점은 사라지고, 이동은 막히고, 임금은 무너진다. 그러면 사람들은 가장 위험한 일이라도 붙잡는다. 잔해를 치우고, 임시 노점에 서고, 물자 운반을 하고, 무너진 도시의 틈에서 하루치 소득을 찾는다. 이것은 정상적인 노동이 아니라 경제 붕괴 뒤에 남은 생존 노동이다.

가자에서 기자와 노동자는 서로 다른 직업이지만, 지금은 같은 폐허를 마주하고 있다. 기자는 그 폐허를 기록하고, 노동자는 그 폐허를 치운다. 기자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고, 노동자는 살아남은 가족의 끼니를 계산한다. 기자에게는 진실을 전할 자유가 필요하고, 노동자에게는 안전하게 일할 권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전쟁은 두 권리를 동시에 짓밟는다. 폭격은 언론사를 가리지 않고, 봉쇄와 붕괴는 일터를 가리지 않는다. 자유와 노동이 각각 다른 단어처럼 보이지만, 전쟁터에서는 둘 다 인간의 존엄을 지탱하는 마지막 기둥이다.

이 사안을 단순한 반전 감상문으로 쓰면 힘이 약해진다. 핵심은 전쟁이 인간의 기본 제도를 어떻게 무너뜨리는가에 있다. 언론은 사회가 자기 고통을 세계에 말하는 통로다. 노동은 사람이 자기 삶을 스스로 지탱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가자에서는 이 두 통로가 동시에 막히고 있다. 기자가 죽으면 세계는 보지 못한다. 노동자가 일터를 잃으면 가족은 버티지 못한다. 결국 전쟁은 건물만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말할 권리와 먹고살 권리, 기록할 권리와 일할 권리를 함께 무너뜨린다.



국제사회가 세계 언론자유의 날마다 기자의 안전을 말하고, 노동절마다 노동자의 존엄을 말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가자에서는 그 말이 너무 늦게 도착한다. 기자들이 이미 죽은 뒤에 보호를 말하고, 노동자들이 이미 폐허 위에 선 뒤에 존엄을 말한다. 국제사회의 언어는 늘 엄숙하지만, 현장의 시간은 기다리지 않는다. 성명은 발표되고, 기념일은 지나가고, 다음 날 가자의 기자는 다시 카메라를 들고 나가며 노동자는 다시 잔해 더미에 오른다.

이번 기사는 그래서 ‘가자의 비극’이 아니라 ‘기념일의 모순’을 보여주는 글로 가야 한다. 세계는 언론의 자유를 기념하지만 가자의 기자는 죽음을 취재한다. 세계는 노동자의 날을 기념하지만 가자의 노동자는 폐허 속에서 가장 낮은 임금과 가장 높은 위험을 감수한다. 자유와 노동이 인류 보편의 가치라면, 가자는 지금 그 보편 가치가 가장 처참하게 시험받는 장소다.

가자에서 언론자유의 날과 노동절은 각각 다른 날짜였지만, 같은 질문을 남겼다. 누가 진실을 기록할 것인가. 누가 폐허를 치울 것인가.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왜 보호받지 못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세계는 기념일을 가질 자격은 있어도, 그 기념일을 자랑할 자격은 없다.

참고문헌

  1. Al Jazeera, “World Press Freedom Day marked in Gaza as journalist death toll rises,” 2026.5.3.
  2. Reuters, “Pope marks World Press Freedom Day, laments violations and honours slain reporters,” 2026.5.3.
  3. Middle East Monitor, “On Labor Day, workers in Gaza are living under difficult conditions and earning very little due to the war,” 2026.5.1.
  4. Al Jazeera, “On May Day, Gaza’s workers find whatever source of income they can,” 2026.5.1.
  5. Palestinian Information Center, “More than 260 journalists martyred in Gaza as world press freedom marked amid escalating targeting,” 2026.5.3.

Socko/Ghost


2025년 12월 25일 목요일

허위조작정보법, 불편한 진실을 말할 자유도 배상 계산부터 해야 하는 사회

 

세상소리 ㅣ Master of Satire

[논평]

이 법의 가장 큰 문제는 ‘허위조작정보’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넓고 불명확하다는 점이다. 무엇이 허위이고, 어디까지가 조작인지, 누가 그것을 최종 판단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법문 어디에도 명확하지 않다. 그 결과 판단은 시민이 아닌 권력과 기관의 손으로 넘어간다. 표현의 자유는 항상 불편한 말, 거슬리는 말, 아직 진실로 확정되지 않은 말에서 시작되는데, 이 법은 그 출발점 자체를 봉쇄한다.

이 법이 실제로 겨냥하는 대상은 ‘악의적 가짜뉴스 유통업자’라고 설명되지만, 현실에서 가장 먼저 위축되는 집단은 일반 시민이다. 카카오톡 단체방에서 정책 비판 글 하나를 공유하는 행위, 블로그에 공공기관 대응을 문제 삼는 후기, 지역 맘카페에서 학교·병원·행정 불편을 제기하는 글조차 ‘허위 유통’으로 고소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시민은 더 이상 사실을 말하기 전에 “이게 5천만 원짜리 말인가?”를 먼저 계산하게 된다.



특히 징벌적 손해배상 최대 5배라는 조항은 보호 장치가 아니라 위축 장치다. 법적으로 이익을 얻는 쪽은 명확하다. 조직, 권력자, 자본을 가진 쪽이다. 반대로 위험을 떠안는 쪽은 개인, 내부고발자, 피해 호소자다. 결과적으로 이 법은 ‘거짓을 처벌’하기보다 문제 제기 자체를 사전 차단하는 효과를 낳는다.

언론과 국민은 대립 관계가 아니다. 언론은 국민의 하소연이 사회적 의제가 되는 출구이고, 시민의 경험이 공적 사실로 검증되는 통로다. 그런데 이 법은 그 출구를 동시에 좁힌다. 시민은 말하지 못하고, 언론은 보도하지 못하며, 사회는 알지 못한다. 침묵은 안정이 아니라 부패의 온상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법이 권력 의지에 따라 선택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은 ‘허위정보 근절’이지만, 내일은 ‘국정 방해’, 모레는 ‘사회 혼란 조장’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는 한번 위축되면 되돌리기 어렵다. 법은 칼과 같아서, 휘두르는 손이 바뀌어도 상처는 남는다.

국민은 묻고 있다.

“이제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말할 자유도 배상 계산부터 해야 하는 사회에 살게 된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법은, 이미 민주주의의 보호막이 아니라 시험대가 된다.


참고문헌

  • 한겨레, 「위헌 논란 ‘정통망법 개정안’ 국회 통과…언론단체 “표현의 자유 훼손” 반발」

  • 헌법 제21조 (언론·출판의 자유)

  • 한국기자협회·전국언론노조 공동성명

  • 헌법재판소 판례: 표현의 자유 및 과잉금지원칙 관련 결정들



세상소리 ㅣ Master of Satire


Socko

2025년 12월 15일 월요일

이재명 · 연산군 · 히틀러 비유는 경고인가, 선동인가

이재명·연산군·히틀러 비유는 경고인가, 선동인가



[논평]

최근 한 유튜브 강의에서 진행자는 이재명이라는 현 정치인을 조선의 연산군, 그리고 나치 독일의 히틀러에 비유하며 강도 높은 비판을 제기했다. 이 비교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강의의 핵심 주장은 이렇다. 언론 통제, 표현의 자유 위축, 사법 압박이 반복될 경우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언제나 파국으로 향해 왔다는 것이다.

진행자는 구체적 사례를 든다. 연산군이 비판을 막기 위해 사관원을 폐지하고 신하들에게 ‘말조심’을 강요했던 역사, 히틀러가 언론을 선전 도구로 만들며 반대 세력을 제거했던 과정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는 오늘의 정치에서도 비판 언론과 반대 진영을 압박하는 움직임이 반복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비교가 과도한지 여부와 별개로, 문제 제기의 출발점은 분명하다. 권력과 비판의 관계다.



논란은 여기서 시작된다. 이러한 역사 비유가 경고인가, 아니면 선동인가라는 질문이다. 비유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감정이 아니라 사실의 연결이 필요하다. 어떤 정책이, 어떤 제도를, 어떤 방식으로 위축시켰는지에 대한 구체가 빠질 경우, 비유는 설명이 아니라 자극이 된다. “히틀러와 닮았다”는 선언만 남고, 독자는 “그래서 지금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이 지점에서 또 하나의 모순이 발생한다. 역사 비유를 비판하는 글이 다시 추상적 비판으로 흐를 때다. ‘선동의 위험성’, ‘비유의 책임’을 말하면서도 정작 누가, 어떤 발언을 했고, 왜 문제가 되는지를 밝히지 않으면, 독자는 다시 묻게 된다. “그래서 누가 뭘 어쨌다는 건가.” 비판에 비판이 덧씌워지며 논점은 한 단계 더 멀어진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방식은 특히 위험하다. 우리는 구체가 빠진 논쟁을 흔히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겨왔다. 그 결과 남는 것은 판단이 아니라 피로다. 한쪽은 ‘독재의 징후’를 말하고, 다른 쪽은 ‘선동’을 말하지만, 그 사이에서 검증 가능한 사실의 목록은 사라진다. 공론장은 토론이 아니라 레토릭의 충돌장이 된다.

역사 비유는 금기가 아니다. 그러나 비유가 힘을 가지려면 현재의 사건과 제도에 대한 구체적 검증이 선행돼야 한다. 동시에 그 비유를 비판하는 글 역시 같은 기준을 지켜야 한다. 추상을 비판하면서 추상으로 도망치는 순간, 비판은 자기모순에 빠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센 비유도, 더 도덕적인 경고도 아니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해석이며, 어디까지가 추론인지를 분리해 제시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과격한 단정이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구체적인 질문에서 살아남는다.



세상소리 ㅣ Master of Satire


Socko

단기 월세 의혹부터 조국·이광재·우상호 논란까지… 6·3 지방선거 민심 흔들리나

  생활형 논란이 지방선거 국면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ghostimages 지방선거는 늘 묘한 선거다. 대선처럼 거대한 국가 비전이 중심이 되는 것도 아니고, 총선처럼 정권 심판 구도가 완전히 압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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